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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첼시의 살림꾼 후안마타 누구인가..

2012년 첼시에서 제가 가장 좋아 햇던 선수는 후안마타 였습니다.

 

2011년 첼시로 이적되어 오면서 ...

 

아직도 그때의 살림꾼 역할을 했던 마타가 기억에 강렬하게 남네요..

 

램파드는 심장을 잃었고.. 드록바는 신에서 인간으로 변했고,,,,,토레스는 골 넣는걸 잃어버렸던 그시즌..

 

후안마타가 아니였다면, 2011년 챔스에서  우승할 수 있었을까요?....

 

 

 

 

간단하게 후안마타의 연혁을 읇어보면 1988년 4/22일 스페인 지역의 서북부인 부르고스에서 태어 났습니다.  12살이 되던해 레알오비에도 유스팀에 가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와의 인연을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

 

12살에 이미 유스팀내에서 공격수가 보여야할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팀내의 자랑 거리 였습니다. 결국 15세에 레알마드리드 유스팀에 함류하게 되고, 15세이하 스페인 대표팀에도 함류하여 천재성을 알리게 됩니다.

 

당시 네그리도가 최전방 공격수 였으며, 그위를 후안마타가 어시스트를 주로 했던 걸로 기억하네요.

 

그리고 2006년 열린 19세이하 월드유스컵에서도 마타는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면서 유벤투스, 리버풀, 아스날등 많은 빅클럽팀들이 군침을 흘렸지만, 스페인을 떠나고 싶지 않았는지 발렌시아를 선택하게 됩니다..

 

당시 발렌시아에는 마타와 같은 실바, 그리고 스페인 최고의공격수 였던 비야등이 있었으며, 모리엔터스 알벨다도 있었죠..

 

 

 

하지만, 이적 첫 시즌 팀내의 베테랑들의 대대적인 방출이 이뤄지면서 팀 성적이 엄청 추락하게 되죠.

그때 감독이 아마 로날드 쿠만이라는 감독이였을겁니다. 팀은 추락하였지만 마타에게는 기회였기도 했습니다.

아직 정식 주전은 아니였지만, 이러한 추락속에서 팀내주전인 비센테를 확실하게 벤치로 미어버리면서 왼쪽 미드필더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만듬으로써 실바 비야와 함께 극적인 잔류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또한, 코파델레이 결승전에 선착한 발렌시아는 헤타페와의 경기에서 후안마타의 선제골에 힘입어 8년만에 코파델레이 컵에서 우승컵은 앉게 됩니다.

 

이때 나이 19세 11골을 넣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19세나이에 11골이면..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하네요.

유로 2008년 11월 칠레와의 평가전으로 첫 국가대표 데뷔 경기를 가졌으며, 09/10시즌에는 10번 등번호를 받으면서 발렌시아의에이스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후 2010/2011년 시즌전 팀의 자금 문제로인하여 실바와 비야가 떠나면서 날개 잃은 추락이 예상 되었지만, 최전방 공격수 뿐만 아니라, 왼쪽, 오른쪽, 중앙의 전 공격 포지션을 담당하면서 발렌시아 상승을 진두지휘 하였으며, 리그 3위에 오르면서 챔피언스 진출권을 따내는 쾌거를 달성합니다. 당시 유로파와 리그를 합쳐 14골 정도 넣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시즌 후 또다시 자금문제가 있었던 발렌시아는 결국 거금을 제안한 첼시에게 후안마타를 팔게 되면서 후안마타는 푸른사자 첼시의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당시 감독이였던 비야스 보아스 감독은 늙은 첼시를 어리고 역동적인 첼시로 바꾸길 원했고, 그런 보아스의 눈에는 후안마타가 제 1순위였으며, 당시 첼시 10번이였던 베나윤이 등번호 변경을 흔쾌히 수락하면서 10번 등번호를 받으면서 에이스 대우를 해주게 됩니다. 

 

 

 

이적후 첼시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후안마타는 기대에 부흥하듯이 몇경기도 안되서 리그 3라운드 노리치 시티와의 경기에 교체출전을 하면서 골을 작렬합니다.

 

당시 첼시가 후안마타를 데려오기위해 지불한 금액은 28M 정도였던걸로 기억하네요.

28m라면 거져 데리고온게 아니였을까요? 엄청난 활약을 했으니깐요.

 

다음에는 후안마타 위기인가? 이어집니다 ^^.. 좋은 하루 되시고 감시 조심조심!!